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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 이곳에 들어온순간 눈물이 먼저 말을 합니다...미안하고 부끄럽고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눈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전 네명의 아이들을 키우고있는 어머니입니다.사실 그날 처음 그 소식을 접한건 오보였습니다....별일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큰배가 가라앉는다는건 가벼운일이 아니기에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죠...너무나 어이 없었습니다...제대로 된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요...해경은 뭐하지...저럴거면 도대체 경찰이 왜 필요한거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어요...지금도 자료화면에서 세월호가 뒤집히는 장면 나오면 보지 않습니다...그 안에 있을 아이들이 생각나 가슴이 찢어질거 같아서...저희 사랑스런 큰딸이 그때 그 아이들이랑 동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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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학교갔다가 똥을 누면서 인터넷을 하는데 300명이 갇힌 배가 잠수함이 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티비를 켰습니다. 뉴스 속보가 나오더군요. 그거 보고 학원엘 갔는데 선생님이 전원 구출됐다고 해서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짐에 와서 보니까 측덩이 잘못됐다고 하며 이직도배 안에 300명이 갇혀있다는 기사를 읽고 어이가 없어서 라면먹고 바로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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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50분에 뛰어내려으면 304명 다 죽지 않았을텐테 반에 뒤집어 있을때도 말이지매뉴얼 없어길 때문이다. 있어도 교통 위반 잘 지키지 않으면서 1초 빨리 갔으려다 먼저 저세상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장점 보다 단점이 지금처럼 둔화 되어서 선진국보다 1~10년이 뒤져저 있다. 기술력 초반 앞서다 있다가 점점 밀려있다. 원격조종 자동차 IT 강국 옛날이고 인터넷만 강국이면 뭐하나. 의학, 문화 등 노벨상 후보조차도 없는데.. 기초조차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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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신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출근하여 오전 근무를 하던중 세월호 소식을 접했고 다행히 전원 구조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이후 환자들이 기사가 오보였데요 학생들이 많이 죽었을거 같아요 라는 말에 티비를 확인하였고 실종자 사망자 수가 카운트 되고있었습니다. 전국민이 슬픔에 빠진 그 사건으로 저희병원은 며칠후 예정에 있었던 워크샵 밎 아웃팅 활동을 전부 취소하고 애도를 했습니다. 7시간 직장에 있었고 환자분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잊지않았고 지금도,지켜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켜볼것입니다.절대로 절대, 단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기억하고 기억할겁니다. 아이들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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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둘째뱃속에 임신중이였다 7월2일날 낳았으니 4월이면 7개월쯤‥친정가게에 가서 카운터를 봤다 뉴스를 보며 전원구조래서 다행이다했다거래처아저씨들이 물건넣으며 라디오들으며 왔는데 어떻게됐냐고 난다행이다라고 했고 나중에 보니 거짓이였다어떻하냐고 아이들,사람들 어떻하냐고말도안된다고 울었던기억이 난다난그날 검정색 무릎까지내려오는 옷을 입고있었다난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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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16 정신없이 장사하던 시기 그래서 관심을 가질수 없었던...그러나 지금 이순간까지 아이들을 생각하면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고 처벌하고 용서해선 안됩니다그 어느 누구도 ..목적을 가지고 이런 참극을 저지른 자나.. 그리고 우리들도 다 죄인이고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어른들 모두가 죄인입니다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수 없습니다 꼭 밝혀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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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티비를 보다가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고를 접했고 바로 YTN을 틀었던 기억~상상할 수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계속 시간은 가는데 구조가 안되는 안타까운 상황들~배안의 유리창 너머로 밝은 황색 구명 조끼를 입은 아이들의 안타까운 손짓들~아무것도 진전 되지 않는 상황들~그리고 아무 것도 할수 없었던 나의 상태~9시 뉴스에서는 이젠 배의 밑바닥 도 보이지 않았고 풍선만 띄어 논 검은 바다의 그날~이민가고 싶다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마음~슬픔과 분노를 넘어~내가 이나라에 살고 있다는 현실과 자괴감~2014년 4월 16일 ~온통 머리는 멘붕 상태의 그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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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인터넷과 뉴스를 켜놓고 온 신경과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월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배가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온갖 말들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지만 내가 간절히 바랬던"아이들을 구조했습니다."라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부모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아픕니다.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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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모친상 소식에 그 쪽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세월호 침몰 소식을 그리고 전원 구조 소식을 내보내던 시간. 그러다가 아직 나오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소식이 전해졌고요. 택시로 장례식장을 이동하는 내내 라디오에서는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었어요. 저보다 서른 살 정도 많은 분의 어머니. 치매를 오래 앓으셨던 분. 그래도 상주는 슬프게도 울었어요. 괜찮다가 울다가 했어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저 배에 탄 사람들을 구조해야 할텐데. 구조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이야기도 했지요. 그렇게 그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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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중에 너무 비현실적인 뉴스에 깜짝 놀랐고, 전원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에 안도하다 오보라는 말에 또 다시 떨어야 했던 날이었습니다. 특히그 전 해에 관련 업무를 했기에 더욱 두렵고 슬펐습니다. 너무 늦게 행동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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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간판과 인테리어를 하는 개인사업자입니다,.그날 부산 인근에 양산에 있는 새마을금고 오픈현장에 견적을 내러갔다가 조금 늦은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가 뉴스를 보고 주변에 헬기에 선박 조금 기울어진 배를 보고 금방 구해지겠군아 생각했고, 곧 이어 선생님한분 과 사망자1명 이란보도가 나왔습니다..그르다 가 배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고 뭔가 잘 못 됬다생각했는데 전원구조란 뉴스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가 배가 완전히 뒤집히고 뒤집혀 남아있는 선수에 잠수복을 입은 두남자중 한 사람이 망치로 두드리는걸 보고 저게 뭔가 싶었죠! 어느 한순간 그때 뉴스의 멘트까지 떠오름니다.그 나이의 조카들이 있는 삼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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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지요. 단원고를 졸업한 한 후배가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수학 여행을 가는 배가 ... 그러면서 울먹였습니다. 저는 그때 천천히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걱정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통화를 하며 잠깐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도 보았구요. 금세 구하지,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티브를 틀어놓았어요. 계속계속 채널을 돌려가며! 그 후로 얼마나 오래 오래,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울며 또 울며, ... 며칠을 그랬을까요.제발 제발 제발... 그랬습니다. 박근혜 정부를 용서할 수가 없는 이유는 그날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흐릅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거리에서 늘 보는,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꼭꼭 밝혀주세요.그게 우리 시대가 꼭 풀어야할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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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진실이 조만간 밝혀지리라 믿습니다.못다핀 꽃을 다시 태어나는 삶이 있다면다시 태어나 서 꿈을 이루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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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버스를 타고 군산에 내려갔다.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던 백수아닌 백수시절. 그날 촬영분은 피난길에 오르는 장면을 찍는거였다. 오래된 배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촬영을 했다. 쉬는 시간에 나무아래에 앉아서 인터넷을 하다가 알게됐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당황스러웠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시 촬영을 했다. 점심을 먹으러 동네 식당에 들렀을때 전원 구조라는 자막을 봤다. 역시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라도 구조를 하는 현직의 해경이나 해군들은 아직 믿을만하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 오후 내내 인터넷을 하며 멘붕에 빠졌다. 볼때마다 구조자의 수가 다르고, 탑승자의 숫자가 달랐다. 이게 뭔가.. 그리고 며칠 후부터 주말이면 광화문 광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하다가 울고 티비를 보다가 울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그게 그랬다. 눈물이 났다. 아직도 그때의 영상을 보면 눈물부터 흐른다.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것들 투성이인데 지겹다는 애기도 한다. 뭐 나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재밌는 일도 아니고 보기 싫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내 문제고 내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다. 내가 거기에 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누구든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렇게 쉽게 잊혀질 일도 아니고 잊혀 져서도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 클럽 리버풀의 슬로건이 있다. You wi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을 것 입니다. 함께 갑시다. #YNWA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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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동기들과 함께 밥을 먹고있었습니다.정보가 빠른 동기 한 명이 단원고 학생들이 탄 세월호가 기울어졌다며 알려줬습니다.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단원고는 내가 사는 지역의 고등학교이고성당에 다니는 학생 중 여러 명이 단원고 학생으로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다고 그 학생들에게 부럽다고 얘기한적이 있습니다.아니 그 학생들이 죽을 위험에 처해있다니...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강의를 듣던도중 나와서 단원고 출신인 대학동기랑 어떻하면 좋냐며 초조했었습니다.그날 단원고 출신인 대학동기가 펑펑 울었습니다.나는 옆에서 그럴리가 없다고 다 구조 될꺼라고 두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배가 뒤집힌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렸고 심한 무기력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타고있는 버스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심한 불안증세를 느꼈습니다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3년전만해도 같이 얘기를 나눴던 애들이 죽었다니...생각만해도 너무나 괴롭습니다.그러나 잊지 않을려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를 갑니다.잊지 않겠습니다. 괴롭더라도 진실을 끝가지 보고 싶습니다.오늘도 제 오른쪽엔 세월호 팔지가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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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었어요. 학교에 있었어요. 직장에 있었어요. 우리 모두 그날 그 자리에 없었기에 살아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7시간 동안 기만당했고, 믿었고, 속았어요. 누군가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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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임신중이었고배에 손을 얹은 채근무처 병원 대기실서 뉴스를 보았어요.처음엔 모두 구조라고.그래서 별 생각 없이 제방으로 돌아갔지요.그다음엔 여직원 한명이 숨졌대요.조금 후에는 또 누군가 시신으로......임신중이라 내 눈물이 헤픈가 했으나점점 드러나는 사실은 너무 감당 안되고 컸습니다.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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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근무중 소식듣고 처음엔 모두 구조 되었다기에 다행이다,,, 그런데 이게 모지~??? 결국 그어린 예쁜 아이들의 비극을 기사로보고 일하면서도 눈물이계속 났습니다,, 애들끼리 배안에서 웃고떠들면서도 기다리면 구조된대~~ 라고 생생히 이야기하는 폰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저릿하던지,,,,나같은 일반 민간인도 다기억나는데 청와대 관련 일했던 인간들은 얼마나 돌대가리들이면 그날 뭐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안날까요,,,?사필귀정 인과응보 본인들에게 되돌아갈 날 반드시 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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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모두 구출될거라고 믿었어요.사실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그래서 그날 뭘 하고 있었는지 더 생생히 기억나요.가끔씩 그날의 아이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면너무나 큰 고통과 그에 비례하는 죄책감이 밀려옵니다.7시간동안 내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했더라면,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누군가도 좀 더 빨리 행동을 취했을지 모르는데.멀고 먼 사춘기의 터널을 지나면혼란스럽지만 반짝이는 20대와세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30대도 있는데.아이들이 이 모든 것을 누렸어야 했는데.그 날 저는 너무 안일했어요.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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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은 울아들을 낳고 8일후 산후조리원에 있었네요. 오전에 아침을 먹고 모유수유시간 거실 소파에 앉아 아들 젖을 물리며 세월호 침몰 뉴스를 조리원동기와 보았습니다. 어머어머 놀라며 함께 보다가 전원구조되었다는 속보를보고 안심했던기억이납니다. 그러다 오보였다는것이 밝혀지고 그날 하루종일 밤늦도록 방에서 구조를 바라며 늦도록 뉴스를 시청하였던 기억이 나네요. 원래 치매를 걱정할정도로 기억력이 나쁜 저인데 그날일은 생생하네요. 사랑하는 아들의 탄생,조리원생활,황사와 미세먼지, 때이른더워, 그리고 세월호.... 잊혀지지 않는 2014년도 4월의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