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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못한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내가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그저 티비로 바라보며 그들의 비하면 너무도 가벼운 안타까움 그리고 아무것도 해줄수 없고 단지 노란리본만 기억할 수 있는 나라서 차마 유가족들에게 힘내라고도 못하겠다어떻게 힘낼 수 있는가 괜찮다라고도 못하겠다어찌 괜찮을까 그저 우리의 할일은 기억하는 것 노란리본을 그 안타까움과 10대의 아름다움 사람의 이기심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만큼 최대한 같이 슬퍼하는 것 가늠하지 못할 그아픔을 아파할 것 그것 밖에...그리고 바다를 향해 진실을 비추는 등대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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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3이라는 핑계로 그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기 위해 촛불집회에 참가한 날, 그리고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날, 눈 앞에서 지나가는 고래 한 마리와 그 위에 있던 학생들을 보며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학년인 그들과 여러 사람이 제주도로 오던 배 안에서 사고가 나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사를 학교에서 보았을 때, 저는 당연히 야자가 끝나면 구조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부둥켜 안는 사진이 담긴 기사를 볼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늑장과 잘못된 대응 그리고 원인불명의 여러 이유가 모여 세월호는 여러 생명을 바다 속에 가둬버린 더러운 정치로 얼룩진 사건이 되었습니다. 때론 부모님과 싸우고, 화해하고, 고마움을 느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학 입시와 수능을 보았을 그들이 왜 정치로 얼룩진 더러운 정부의 대책으로 인해 바다 속에 잠겨져 있어야합니까. 왜 저는 여기 이렇게 앉아 그들을 기억하며 안타까워 해야합니까.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 아닙니까. 국민을 지키고, 위하라고 만든 정부 아닙니까. 바다에 가라앉으며 구조를 기다리던 그들은 이제 바다 속에서 가족의 품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슬픔과 이유를 저는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이 나라의 참된 주인인 국민마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것이 2014년인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닭대가리 대통령과 같아져선 안됩니다. 저는, 우리는, 국민은 세월호의 아픔과 슬픔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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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5학번을 꿈꾸며 공부하던 고3이었습니다. 학교애서 세월호의 침몰 사건을 접했고 집에 돌아왔을때 나의 일도 아니고 나의 친분이 있는 사람의 일도 아닌데 우리가족은 모두 울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과 울었습니다. 10월, 대학 면접에서 세월호 관련 질문이 나왔습니다. 또 울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당일과 그 다음날의 일들 무얼했는지 기억합니다. 과학선생님이 우셨고 미술선생님이 화를 내셨고 문학 선생님이 분노하셨고 저희반이 침울했습니다. 저는 교탁 바로 앞자리었고, 제 책상밑 서랍에는 한쪽은 ebs교재와 한쪽에는 핸드폰과 이어폰이 있었습니다. 교무실에는 문학선생님과 영어선생님, 수학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들의 자리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꼭 정치하시는 분들은 기억을 못할까요. 청와대에 있으신 분들은 왜 기억이 나지 않을까요. 이건 말도 안됩니다. 진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거짓은 언제까지나 진실을 가릴수 없습니다. 청문회에 거짓말 탐지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000일이 지나도 10000일이 지나도 잊지않겠습니다. 못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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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오전9시50분경 부터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월호 침몰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타고 있었고 점점 더 깊이 침몰해가는 뉴스를 티비를 통해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전원 구조 소식에 아 다행이다 하면서도 계속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전원구조가 아니랍니다 . 생각보다 상황이 안좋구나 실시간으로 세월호가 점점 가라 앉는 뉴스를 통해 보면서 안타까움에 침울해하며 뉴스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습니다 전원구조가 되길 바라면서요 어떻게 저런일이 있을수 있나 그날에 충격은 아직도 마음이 아립니다 . 오후가 지나도 저녁이 지나도 그리고 몇일을 아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며 눈뜨면 뉴스부터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뚜렷한 기억이 왜 기억이 안나는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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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저는 학교에 가려고 통학버스를 기다리며 인터넷으로 뉴스 기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가던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국가에서 알아서 잘 구조하겠지라고 생각했고 수업을 들으며 틈틈히 사건 기사를 계속 보았습니다. 전원 구조 됐다는 기사를 봤고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오보였고 결국에는 많은 동생들과 일반인 분들이 차디찬 물 속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차디찬 물 속에서 눈을 감으신 304명의 영혼들을... 그리고 그들을 그분들을 그렇게 만든 악마들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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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저도 모자란 인간이었던지라...아직도 힘들게 버티시는 피해자 가족분들이 계시는데도 가끔 잊어버리기도했습니다..또 특별법에 관해 갑론을박이 심했을때 정부가 몰아가는 상황에 잠시진짜로?하고 의심을해보기도했던것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피해학생들과 동갑입니다. 당시 학교 컴퓨터실에서 포털사이트 실검을 확인하는데 진도가 1위 더군요. 평소처럼 심각한일이 아닌줄알았고 더군다나 전원구조라는 소식이 한참 보도되던때라 다행이다 하고 넘겼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교방과후수업때 전원구조가 아니라는말을 듣고 사실 실감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뉴스를 보고 하루 이틀 사망자가 늘어갈수록 친구들에 대한 감정때문에 슬프기도하지만 제대로행동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반친구들은 구호물품을 모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당시에 모두가 같이 공감해주던 국민들과 유가족분들을 멀리 하게하며 이상한 소문들과 얘기들을 무성하게 진.짜.선.동을 한 무능한 정부가 요즘 이슈죠. 세월호 천일과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세월호 다큐와 세월호 가족협의회에서 만드신 영상들과 생존학생들의 다큐까지 빠짐없이 챙겨보고 나서야..정말 말도안되는 것으로 정부가 국민들과 유가족들을 두번 죽이는구나 라고 생각들었습니다. 여기엔 당시에 기억을 쓰는 곳이지만 유가족분들이 혹시 보실까 두서없게 저런 말들을 늘어놔봅니다. 며칠전 촛불집회에서 유가족분이 촛불이 꺼질까 두렵다하셨는데 걱정하지마십시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전과다르게 진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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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시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학교의 등교시간은 8시 20분이었기에 그후로는 핸드폰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여느때와 같이 하기 싫은 수업을 했죠... 1,2교시 수업이 끝나고 3교시가 되어 과목을 담당하시던 여자쌤이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그래도 다행인게 전원이 구조됬다더라"하시면서요. 그리고는 안전사고 예방에 유의하라하시고는 수업을 마치셨습니다. 그렇게 오전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난 후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세월호소식이 오보였다고 전해주셨습니다. 저희는 당황해 선생님께 물었을때 선생님은 세월호 인원 모두가 구조된게 아니라고 얘기하셨습니다. 학교 분위기는 어두워 졌고 선생님들도 수업대신 계속해서 뉴스를 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세월호 사건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저는 기억하고 우리는 기억하며, 오보였지만 모두 구조됬다했을때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게 오보임이 밝혀졌을때 눈물을 흘렸으며, 나중에 그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땐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그런데, 국민들도 기억하는데, 한 나라의 대표가 304명 국민들이, 또 저와 같은 학생들이 죽어가는데 기억이 안난다니.......그 기억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봅니다.그리고 국가에게, 정부에게 국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나봅니다.국가도 정부도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는 기억하고 우리는 추모합니다.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사람들을 그리고 아직 추운바다에 있을 사람들을...우리는 다만 진실이 궁금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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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처음접한곳이 학교에서였는데 누가 말한줄은 몰라도 몇교시후에 어느순간 다 구출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었습니다. 그리고 애들이랑 신이나서 봐보라고 일이 커질리가 없다면서 장난쳤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뉴스를 보니 사실과 전혀다르더군요 전 그래도 곧 구출되겠지 한두명도 아니고 몇백명인데 나라에서 반드시 뭔갈하겠지 이대로 끝나면 말도안돼잖아?하고 몇백명이 그안에서 선밖에 없는곳으로 갈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무능한정부 도대체 어떤 심오하고 복잡한일이 있기에 몇백명중에 한명도 못살린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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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신우신염 때문에 병원 임상병리실에서 각종 검사차 대기중 이였는데 tv에서 세월호 소식이 들려왔다.아~어쩌나 .제발~여기저기서 웅성 거렸고 검사를 마친후에 대기실에 사람들이 모여서 tv를 보는데 다 구했다고 보도가 되었다.거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환호성을 질렀고 그럼 그렇지~우리나란데..하면서 병원을 나와그날 그 병원 장례식장에 직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오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인터넷을 보니 오보였다고.ㅠ.ㅠ그때부터 나는 암담함에 눈물을 쏟았고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내 아이도 고2..수학여행을 준비하고 있었기에..남의 일일수가 없었고..지금도 이 순간도 나는 여전히그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이다.아프고 슬프고..그아이들을 그냥 방치했던 그들이 너무 저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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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7시간 동안 차가운 물속에서 살려 달라고가족들에게 핸드폰 문자 날리는 모습에가보지도 못하는 나는 발만 동동 구르며나라에서 어떻게 해주겠지 그냥 저대로 차가운바닷속으로 아이들을 보내진 않겠지 설마 끈을놓진 않겠지 하며 내내~기도하는 마음으로 뉴스매체만 목을 놓고 바라보며 가슴으로 얼마나울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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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근무였어요. 운행중 항상 라디오를 켜놓는데 단체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탄 유람선이 암초같은데 부딪어 좌초됐다는 뉴스를 들었죠.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던시기라 정부가 언론을 통해 국민의 관심사를 다른 이슈로 돌리려하나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한시간이 지났을 즈음 한명씩 차근차근 다른배로 옮겨타고 있다고 방송이 나왔었거든요. 전원구조 될것이다 라고 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300명이 넘는.? 학생말고도 승선 승객도 꽤 될텐데? 라고 궁금증이 생겼고 실시간 구조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죠. 휴게실에 와서도 다들 티비를 보고 있었어요.근처 해군함대를 출동시키겠다.그런데 해군한명이 출동중 머리를 다쳐 사망했다? 그래서 출동 못한다? 그러다 주변 어선들이 모여들어 각자 나눠탑승시켰고 그인원들이 육지에 하차시킨 인원의 합을 계산하기 쉽지 않다고 했고 그 유람선 안에 아직 많은 인원이 있을거라했죠 배는 뒤집혀 가라앉고 배가 왜 뒤집히지? 궁금했고 에어포켓 얘기가 나왔죠. 반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어두워지기전에 구출해야할텐데...저녁에 퇴근해서도 뉴스에 귀기울였고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사고로 마음이 참 답답했죠. 어느새 구조소식보다 유병언이라는 세글자에 세월호는 묻히기 시작했죠 무엇보다 그날 이후 아이들과 외식이 확연히 줄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물속에 갇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맛난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거란걸 다들 알고있기 때문이었겠죠. 그후로 불경기가 지속되는 이유를 세월호때문이다 라고 치부해버리는 몇몇이들이 너무도 미웠습니다.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나고 마음이 너무 마음아픈데 치유의 시간은 더디기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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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ᆢ울고불고 내자식잃은것과 똑같은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던 그 때 ᆢ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있었을까요 ᆢ분통 터지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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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은 짧은 제 생에 가장 강렬한 기억입니다. 하교하는 길목에서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이 침몰했고 구조작업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는 당연하게도 모두 구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몇명은 조금 다칠 수 있겠지만 다들 살아 올라올 것이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고 그 기다림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 날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과외 수업을 하며 선생님과 발을 동동 굴렸습니다. 저녁에는 제 방의 문에 기대 울며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다 18살. 지금도 18살 사랑스러운 나이로 남아있는 단원고 학생들이 그 당시에 떠올라 제 선배들이 생각나 펑펑 운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더불어 아무 이유없이 단지 세월호에 서 목숨을 잃은 일반인 분들이 떠올라 저는 그 날 종일 눈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3년이 지난 지금도 2014년 4월 16일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기억할 것이고 또 기억해낼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세월호를 잊지 않을 것이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인양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라는 다짐을 한지 3년이 지났고 저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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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그때초등학교5학년이였습니다.학교에서 아침에선생님들이뉴스를보여주셔서세월호사건이일어났다는것을알게되었습니다.학교에서친구들과걱정을하면서학교를마치고학원에갔습니다.학원선생님도Tv로뉴스를보고계셨는데 같이공부하는친구들이다도착하지않아서선생님과친구1명과같이뉴스를봤습니다.전원구조라고 밑에는뜨고있었고 배가침몰하는데 완전히침몰되지않고반쯤침몰하는것이뉴스에보였습니다. 전원구조라고해서안심하고있었는데학원이끝나고나서다시뉴스를보니전원구조가아니라고뉴스가나왔습니다.저의세월호7시간의기억은여기까지지만 어딘가에숨겨진기억은많이존재할거라고생각합니다.절대세월호희생자님들의아픔을잊지않겠습니다.평생기억하고 진실을밝힐수있게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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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바라봤고 아이들을 끌어 올렸으며 아이들을 어깨에 태우며 헬기에 탈 수 있게 도왔다.아이들을 바라보고 그 어떤것도 할 수 없었다."아저씨 어떻게요?"라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그 자릴 벗어날 수 없었다.물이 차오르고 그 물이 날 밀어내고 마지막까지 손을 뻗어 안을 수 있었던건 혁규동생 지연양이었다..그리곤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아무도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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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 선생님께서 배가 뒤집혔다고 알려주셧습니다 그래서 거기사람들은요? 라고 아이들이 물었을때 전원구조라는말에 다행스러웠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그후 다른선생님께서 오셧을때 그 구조된사람들은 어떻게됬어요?에 오보라는 소식을 전해듣고 슬퍼졌습니다. 생존자는 더이상 나오지않고 하나둘씩 시신이되어 숫자가 늘어날때마다 절망스러웠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게 죄인가? 하며 말이죠 그렇게 집에와서 티비를 보고 뉴스를 찾아보며 구조작업 대부분 어민분들께서 도와주셧다 라는 말에 너무 슬펐던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나오라고 지시하지... 처음부터 많은 119 구급정이 가서 유리를 부수고 꺼내주지... 저의 세월호 7시간은...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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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뉴스속보로 사고를 알게 된 순간,시간차를 두고 생존자가 뒤바뀌던 순간,그리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되던 순간,그날 그 순간들을 똑똑히 기억합니다.세월호는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올 것입니다.진실은 기필코 밝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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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살인적인 폭염이 쏟아져도매서운 추위에 눈보라 쳐도천둥이 치고 폭풍이 휘몰아 쳐도아이들은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으로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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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였습니다. 1교시 강의가 있던 터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가정제품을 파는 가게 앞 TV에서 속보가 뜨더라구요. 배가 침몰하는 모습과 그 주위로 향하는 다른 구조선들을 화면으로 보면서 발길을 멈췄습니다.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건가 하구요.빨리 학교에 가야하는 터라 짧게 볼 수 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을 다 구해야 하는데.." 하는 착잡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근데... 뉴스속보가 계속 나면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난건가... 머릿속이 아득해졌습니다. 제 눈을 계속 의심하던 그 날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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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수업이 끝나고 3시 반쯤 핸드폰을 켜서야 사고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때 핸드폰 기종이 뭐였는지 내가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그 뉴스를 봤는지 무엇 하나도 절대 잊히지 않는데집에 와서도 티비 앞에서 뉴스만 봤고 동생이 학원갔다오고 엄마가 퇴근하시고 아빠가 퇴근하시고 텔레비전 앞 사람 수 말곤 달라지는 게 없었지올해는 내가 다시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왜 아직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