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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 2014년 4월 16일일하는 가구공방이 이사하느라고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아침에 본격적으로 짐을 옮기기전 같이 일하던 누군가 수학여행 가던 배가 뒤집어졌는데 모두 구했다는 말을 스치 듯이 했다. 그말에 다행이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 정신없이 물건 옮기고 정리했다. 그 난장판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제품을 만들어야 된다는 말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짜증을 냈고 정신 없이 하루를 쫓기듯이 보내고 나니까 저녁 7시였다. 그때까지 그냥 다 구했다는 말만 알고 있었다. 사장이 선심쓰듯이 이사 했으니까 저녁에 짜장면이라도 먹어야지 하면서 근처 중국집으로 갔다. 기다리면서 TV를 보는데 그제야 다 구했다는 말이 오보인걸 알았다. 화면엔 배가 거의 가라 앉아 있었고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애들이 300명 넘게 아직 갖혀 있다고 . 수심이 40미터. 그래 40미터면 취미로 하는 다이빙으로도 들어가 봤던 깊이, 거기에 아무리 물살이 빨르고 시야가 없어도 ,가이드 줄 내리고 그런 일에 능숙한 프로들이 가서 일할텐데 그래도 절반은 구할 거라고 사람들한테 얘기 했다. 못구한 절반의 부모,가족들은 어떻하지 하면서. 그때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도 절반은 구할 줄 알았는데.,다 못구해도 절반은.......... 겨우 40미터 인데. 그래도 제대로 만 했으면 아니 할일만 했으면 다 구하지 못했더라도 지금 누군가는 살아있을었을텐데 이걸 어떻게 잊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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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 온라인 외신 기자였던 저는 회사에 송고하고 출근할 트위터 기반 기사감을 서둘러 찾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토픽거리 하나를 집어내 노트북으로 재빨리 번역-종합해서 막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 중이라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수학여행 중인 고교생들이 수백 명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찮은 송고를 보류했습니다. 점심 때 쯤 전원구조됐다는 속보가 나오더군요. 그걸 보고 "휴~ 다행이다" 하면서 비로소 토픽을 실었습니다. 오후에 참사를 확인하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망실감에 울컥울컥 통곡이 나는 걸 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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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건너 미국에서 미국뉴스로 먼저 소식을 접한나는 처음엔 다른나라 얘긴줄 알았다.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아직까지 한명도 구하지 못했다고 하눈 방송을 보고 ..설마...설마....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그럴리가 없다며...한명도 못 구해냈다니..그럴리가 없다고...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혼자서 얼마나우겨댔는지 모른다. 배가 완전히 잠기지도 않았는데 구조를 못할리가 없다며...며칠을 아이들 구조 소식을 기다리며 전화기를 놓치 못했고, 뉴스를 볼때마다...소중한 사람들을 애타게 부르는 가족들을 볼때면 같이 울고....모르는 아이들이지만 다 내 아들같고 내 딸 같아서..별이된 그 고운 아이들.....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거짓은 참을 이길수 없다. 진실을 침몰하지 않는다.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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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보고, 뉴스보고...대체 한 국가의 컨트롤 타워가 어디서부터 문제엿는지조차 알수없엇던 그 시간 이엇습니다감투쓴 놈들는 생색내기 급급하고 그 똘마니들는 의전의전...사무실에서 일을하고 잇어도 눈과귀는 방송과 속보로만 향햇던 그때입니다.우리의 소중한 생명들께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 이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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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수학여행단을 싣고 제주로 오던 배가 침몰되었단 뉴스가 나오고 잠시 후 전원 구조되었단 소식에 안심을 하였는데 304명이 죽음에 이르렀다니에어포켓에 기대를 하면서 아침마다 생존자 이름이 뉴스에 나오길 매 순간 기다렸는데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같이 울고 기억해 주는것, 그때는 보름이었습니다. 밤에 운동을하면서 그 달을 보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제 기도가 하늘에까지 닿지를 않았나봐요. 생존자가 한명도 없었으니지금도 밤에 길을 걸을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2년전을 기억합니다. 거리를 지나는 고등학생을 보면 또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미안하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진상이 규명되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시신이라도. 얼마전 기억공간 리본에서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질까요? 라는 질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밝혀지지 않을까요.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게요. 모두들 힘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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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평범한 제 삶속에서도 뚜럿이 기억나는 하루입니다.4.16대전으로 이사후 첫 수학여행떠난 큰딸을 보내고 학원수업가는 버스에서 첫 사고 소식을 들었죠.. 그리고 학원 도착 후에 인터넷으로 아이들전원 구조소식을 들어 안심하고 수업에 들어 갔는데. . . 수업이 끝나고 나온후엔 아이들이 아직 바다에 있다는 거에요..물에선 1부만 숨을 못 쉬어도 . ... . .하늘이 무너지듯 가슴이 덜컥하고 수학여행간 아이안부가 궁금했어요..그 아이들 걱정에 눈물이 솓아지면서도 우리딸 생각했던것도 미안해요.. .그래서 평생기억하며 속죄할거에요.이런 세상 만든 어른의 한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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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똑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그날은 기억이 또렷히 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은 그날 무엇을 하면서 TV나 인터넷으로 소식을 접했고 안타깝고 슬픈마음을 가졌던 기억이 있는데,왜 기억을 못할까요?저도 그날 회사에서 업무를 하던 중간중간에 지점창구에 있는 대형티비로 처음 소식을 보았습니다.손님을 상담하면서도 자꾸 눈은 티비를 향하더군요. 대기하는 손님들도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고,안심을 하다가 오보로 또 다시 마음졸이고....매일 똑같은 공간에서 매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직장인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히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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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네이트온 아래에 지나가는 뉴스 제목에서 사고 소식을 알게 되었고, 모두 구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안도감을 느끼며 일을 했답니다.그러다 오보임을 알게 되고 점점 초조했죠.평소처럼을 일을 한 날이라 엄청나게 크게 다른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사건 순간의 기억은 뚜렷하네요.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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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전 너무나도 놀라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승객들의 구조 소식에 안도하다가 뒤이어 전해진 오보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실감했습니다. 세월호 그 배! 사고나기 2주전 그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큰 아들...머리속이 아득하고...가슴이 먹먹하고...아이들 생각에 절망했던 길고 긴 하루였습니다.전 그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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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사무실에서 메신저로 올라오는 뉴스를 처음봤을때만해도 이렇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뉴스에서는 모든 구조방법이 동원되고있다고했습니다.예상보다 구조시간이 길어지고있을때도 뉴스에서 에어포캣..등등을 거론하면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도할때,저도 끝까지 희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하지막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습니다.끝까지 희망을 놓치않고있었기때문에 충격이 더컸고,굉장히 절망적인 기분이었습니다.이런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가 너무 무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하지만 그뿐.또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그냥 이절망적이 사건을 그냥 잊으려고했습니다.내가 할수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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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너무나 마음 아프게 기억합니다. 쌍문역앞 가판에서 장사할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하루종일 나오는 뉴스들.... 저녁에는 분노와 미안한 마음에 장사를 일찍 접어야 했습니다. 왜이리 먹먹한지... 미안하다.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어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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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이지리아 출장중 숙소에서 알자지라 톱뉴스를 보고 세월호를 알았습니다. 같이 있던 외국인들이 테러났냐고 안부를 물었고, 왜 구조가 늦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냥 하염없이 침몰하는 세월호를 같이 머물던 일본, 중국인들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부끄러웠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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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뜨는 걸 보며, 함께 뉴스를 보던 아빠와 "단원고 2학년 쟤네들 저거 나중에 어른 되고 동창회 하면 저 이야기만으로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겠다~" 하고 안도하며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섰던 기억이 나요. 동창회가 되면 매년 나올 추억이자 해프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묘한 기분이 들어 약속 장소로 향하며 내내 뉴스를 확인했고,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기사들이 하나둘씩 뜨기 시작하며 이게 결코 추억으로 남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리게 되었죠.그 때까지도 알지 못 했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구조가 될 수 있겠지, 실종자들 모두가 살아서 돌아오진 못 하더라도 물 속에서 외로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게 되지는 않겠지...1000일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처음 이 소식을 접한 그 날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달라진 게 없을 거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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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경기도 내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많은 학생분들이 살아계시고, 구조를 구할 때쯤 티비에서는 뉴스가 흘러 나왔습니다. 저희는 그날 수업을 듣다말고 티비와 뉴스를 연결해 수업 대신 뉴스로 구조되길 바라며 지켜보았습니다. 이후엔 수업을 하며 계속해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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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7살, 고1이던 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핸드폰을 제출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당연히 모두 구조될 줄 알았고 많은 사람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고서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왜 구출하지 못했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고 지금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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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뉴스 속보로 제주도로 가던 선박이 침몰 중이고 수학여행중이던 학생들이 타고 있다는 보도를 봤다.막내 딸 아이와 동갑내기인 아이들이 겪을 고초에 마음이 아팠지만~~~그때까지만 해도 그 꽃같은 아이들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차디찬 물속에 수장시켜 버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국가가 그 아이들을 무사히 부모들 품안에 안겨 줄 거라 굳게 믿었다. 이 정부가 이정도까지 도덕불감증에 무능덩어리도 모자라 근무태만까지 자행하는 족속들 일거라고 생각지 못했었다.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다.Tv앞에 앉아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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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간시간 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수업을 미루고 뉴스와 눈물로 가득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잊지맙시다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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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8월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병가 중으로 통원치료 가기전 티비를 통해 세월호 뉴스를 보며 40년을 도보로 버스로 기차로 배로 비행기로 아이들을 수없이 인솔했던 초등교사인 저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아이들 인솔의 책임감과 중압감을 잘 알기에 단원고 교사는 곧 저 자신이기도 했으며 40년간 단 한차례의 사고 없이 정년을 하게된 것에 무한한 감사를 했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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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근무. 월요일에 출근하고 주말에 쉬는 "요일제"보다 지정근무표에 따라 일하는 "순환근무제". 참사 당일 아침에 "수학여행가는 아이들 배가 침몰했다. 큰일이다. 어쩌나!" 발 동동 구르며 집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전날 밤샘 했던 지라 "다행이다~" 가슴 쓸어내리며 쪽잠을 잤습니다. 점심무렵에야 그게 아닌 걸 알았습니다. 가슴이 쿵! 이후 출근하면 한동안 "팽목항 구조현장"을 생중계로 보았습니다.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떠오르곤 했습니다. 화장실 갈 때도 "착신전환"을 합니다. 언제 무슨일이 생기더라도 "통신축선상 대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댓명 근무하는 작은 일터이지만 "마스터디렉터"의 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7시간, 70분, 7분이 아니라 "자리 비운 7초"에 어떤 연락이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7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덮으려는 상황을 그래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럴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 그 사람을 둘러싸고 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 거기에 빌붙어 찌꺼기라도 핥으려는 사람....그들의 "7시간"은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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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욜 아침 법회참석을 위해 법당에 갔다 난 영상담당이라 컴퓨터를 켰더니 수학여행가는 학생들이 탄 배사고가 있다했다 큰일났네 하다가 10시 법회가 시작되고 마치고 점심공양을 하다 아이 담임샘의 호출을 받았다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하다 학교로가 선생님 수업 끝나기를 기다렸다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열었더니 아직도 구조된게 아니라 심각한 상태였다 말썽을 피워 학교로 호출돼 학교 뒷문 근처 벤치에 앉아 기사를 보노라니 우리 애 일은 일도 아니라 싶었다 그애,이애 할것없이 애들이 다 가여웠다 지금도 세월호란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것이다 지금 내 아들이 세월호 아이들 나이가 됐다 진상규명까지 힘을 보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