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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대학교 방학이였고 늦게까지 잠을자고 있었는데 아빠가 뉴스소리를 높이더니 나를깨우면서 제주도가던 배가 침몰했다고했다비몽사몽으로 뉴스를 보기시작했고 쫌있으니 뉴스에서 단원고 학생들 모두 생사확인 구조라고 떠서 정말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잤다...그런데 몇시간후 잠에서 깨서 뉴스를 보는데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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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평범하고 단조로운 날이었다.곧 있을 취직 시험 때문에 책에 정신 팔려있던 그 날, 가족 중 누군가가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는 수학 여행을 가던 학생들, 같이 우정 여행을 떠나시던 어른들, 각자의 설렘을 갖고 떠나던 많은 수의 사람들이 타던 배가 전복했다고 했다.그러고 나온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내 할 일에만 집중했다.공부를 끝낸 후 전원 구조가 오보였단 사실에 한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대부분의 승객들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 너무 가슴 아팠다.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내 가족이었던 그들이 아직 배 안에 있단 소식이 너무 가슴 아팠고 금방 구조가 되지 않았단 사실에 너무 슬펐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너무 분노했다.하늘에 별이 되어버린 그 분들께, 그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꼭 이런 일이 반복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마지막스로 거기선 그런 아픔 없이 행복하게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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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김포공항에 도착했을때 공항에 틀어져있던 뉴스에서 생생히 봤던 자막,세월호 침몰, 전원 구조자막을 흘끔 읽고 큰일이었네 하지만 전원 구조라니 다행이다~ 하면서 공항을 나섰던게 생생히 기억납니다그리고나서 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 이게 왠걸.. 아까 전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왜 못구하는거지 아직 배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발을 동동구르며 지켜봤는데결국 그대로 가라앉아버린 배..아무것도 할수없던 무기력함이 기억납니다..애들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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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그 날은 시험때문에 밤을 새며 공부하다, 한국 사전을 검색하려 모 포털 싸이트에 접속했어요.그리고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결국 밤 새 새로고침만 하다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한 채 학교로 향했죠.문을 열고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친구들이 묻더군요, 무슨 일인지, 한국 정부는 대체 왜 구조를 하지 않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우리 정부를 믿는다, 그들은 모두 구조 될 것이다."이런 말 따위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대강 시험을 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그리고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영화를 보고, 낮잠도 잤습니다. 그리고 예습을 했어요.2014년 4월 16일. 그저 그렇게 똑같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는 살아 있었으니까요.그리고 내일을 위한 대비도 했어요, 저는 살았으니까요.사실은 아주 죄송했습니다. 이런 별 것 아닌 하루를 그들은 이제 영원히 누리지 못함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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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수요일처럼 교생실에 모여 타 교과 교생들과 담소 나누던 아침이었습니다. 4월 중순답게 날은 선선했고 시험을 치르는 학교는 조용했습니다. 타과 교생 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기사를 보여줍니다. 수학여행길에 아이들이 사고를 당했다고요. 다들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전; 그나마 이 중학교의 아이들은 시험 중이고 이 무섭도록 아픈 사실을 조금 늦게 알게 될 것임에 조금은 걱정을 덜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났거든요.그렇게 가라앉은 배에 탔던 탑승객들을 걱정하는 중에 정말 천만다행의 표제를 걸고 기사 하나가 떴습니다. 전원구조했으니 걱정말라는.안심한 마음으로 퇴근한 우리는, 집에서 다시 끔찍하게 돌변한 기사들을 읽었습니다. 실종자의 수는 가늠할 수 없고 아이들은 아직 찬 바닷물에서 떨고 있다는 기사말입니다.무력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서 그저 한 명이라도 더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시계가 어찌 바뀌었는지 기억이 엉켜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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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날 어느날과 같이 점심시간에 밥을먹고있었습니다. 분식집에서요그때 티비에서 세월호기 기울어지고있는 영상과 모두를 구했다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 그걸보며 저는 말했습니다 "다행이다. 다 구했네! "근데 앞에 앉은 언니가 말했습니다 "아닐수도있지!"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가 기술력이 얼만데 저 큰배를 못구하겠어?" 라고 말했는데 그 보도가 오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언니와 만나면 이 얘기를 하곤합니다. 정말 우연하게 그말이 맞아버린 이 상황을 보며 우리는 우울하곤 합니다. 저는 그 날의 진실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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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엎드려 울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커질수록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가만히 눈감고 슬픔을 느끼다가아픔을 느끼다가또 한번 혼자 엎드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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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수업을 비몽사몽인채로 끝내고 난 기숙사로 돌아왔다. 가방을 던져두고 침대에 뛰어들어 비스듬히 누워 핸드폰으로 인터넷 포털에 접속했다. 이상한 소식이었다. 제주도로 가는 큰 배 하나가 침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책상에 앉아있던 룸메이트 언니에게 이 기사 보았냐고 했더니 언니는 태연했다. "응 봤어. 금방 다 구조 될거야."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금방 구조대가 올 것이고 다 안전히 빠져나올 것이라 생각했다.난 기사 화면을 끄고 sns를 한창 들여다 보다 잠이 들었다. 점심즈음이 다 지나 깨어났는데 구조가 마무리 되어간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럼 그렇지. 하고 다시 수업에 갔다. 해가 질 무렵, 난 다시 돌아왔다.친구들과 연락을 하다가 다시 접속한 포털 사이트에서 이상한 기사를 보았다.아까 기사는 오보였다.학창시절 이름만 알던 친구 하나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굴만 알 뿐인 친구가 침몰하는 배 안에 있었다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 친구의 sns에는 그가 그 배를 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친구들의 글이 가득했다. 이틀이 지나 그 친구는 자세한 정황을 썼다가 지웠다. 자꾸만 그 때 기억을 물어보는게 고통이라고 했던거 같다.결국 수많은 아이들이 죽았다.그 아이들은 나보다 한창 어린 동생들이었다.그들이 마지막 순간 보내온 문자나 정황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난 그 때 기숙사 침대에 누워 서러워져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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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끝나고 여느날과 다름없이 집에서 엄마랑 빨래를 널다가 뉴스를 봤어. 깜짝 놀라서 보는데 다행이 전원구조라고 하더라. 엄마랑 나는 다행이다 생각하며 얼마나 무서웠겠냐고 다친사람 없어서 다행이라고 티비를 끄고 자고 일어났는데 오보였대 나는 따뜻한 곳에 누워 자다 일어났는데 너희는 차가운 바닷속에 있대. 처음엔 이게 뭐지? 싶더라 그후엔 계속 눈물만 났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안해. 무능한 정부의 희생양이 왜 너희가 되야 했을까. 잊지않을게 기억할게. 그곳에선 따뜻하길 그곳에선 편안하길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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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초등학교3학년10살짜리 꼬맹이였습니다.뉴스에서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그리고 7시간후 모두들 다급했습니다.근데 왜일까요? 순수한 한 아이의 눈에는 정부가 절대로 다급해보이지 않았습니다.지금보니 한번도 빗나간 적이 없는 꼬맹이의 직감은 불행히도 맞았습니다..처음엔 가라앉는 배를 처음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그 배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타고 있었는지,얼마나많은 푸른 숲을 만들 주목들이 죽어갔는지 또 누가 그랬는지.. 매일매일 실종자 수 사망자 수가 뉴스에 나왔습니다..그리고 배가 거의 다 가라앉았을때,그제서야 꼬맹이는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느껴졌습니다.생애처음으로 뼈가 시려왔습니다.학교에서 .친구들은 수학여행을 못간다고 불평했습니다.꼬맹이는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네...못했습니다. 세모그룹이 저지른 일이라 생각해왔습니다.선장이저지른일이라 생각했습니다.그리고 정치에 관심을 가질땨 쯤, 박근혜 최순실 데이트가 터졌습니다..그리고 알았습니다..꼬맹이에서 예비중이 된 한 새싹은 괴로웠습니다.그날..청년들이 죽어가던 날..기억하고 있었으나 기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그때 왜 그랬을까..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이러려고 초등학교때부터 일찍 죽도록 공부했나 자괴감이 들었습니다.막상 진짜 공부는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사회의 부패가 이정도일줄 몰랐습니다..이건 영화보다 더 허구 같습니다..양심을 버린 인간들...겁이 납니다.나도저렇게 되는 걸까?..언니 오빠들..우리는 ..당신들의 후배들은 기억하겠습니다..여성이라는 단어 속에 숨는 한 인간을 찾아 당신들의 죽음이 왜 이렇게 일찍 온건지,돈이라는 종이에 숨는 인간들을 끄집어내어 묻고,살기위해 당신들을 죽인 국회에서 침묵한 그들에게 무슨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려줄 것 입니다.기억하겠습니다.영원한 대한의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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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시험기간이었다.대학에 입학하고 만난 첫 시험기간이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냥 붕붕떠있었다. 정신없이 시험을 보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멍하니 누워있었다. 뉴스를 접하고 멍해진 생각들은 얼어붙었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무서웠고 두려웠고 감히 실감을 하지도 못했고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사실 꿈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모든 감각에 무뎌져 산 것 같지도 않아 답답해 펜을 들어 무작정 시를 쓰고 마음을 담아내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날은 아무런 생각도 감히 하지 못했다. 정말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봐 몽롱한 상태를 걷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거의 나는 도망쳐왔다. 겨우 지금에서야, 상처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겨우 바라보게 되었다.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되뇌며 나 마주본다. 눈물이 터져나온다. 상처의 선홍빛 피일지 몰라. 나 이제 그 물을 마주보련다. 마음껏 울고 소리치련다. 잊지말자 언제나 생생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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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르게 그날만 오후 출근이라 늦게 일어나서 뉴스를 틀었다. 제주도 가던 배가 침몰했고 전원구조 했단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나서 초록색 원피스를 꺼내입고 더러운 차를 손세차장에서 세차를 하고,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먹으며 출근을 했다. 책상 가득 올라와있는 서류를 처리하면서 포털사이트를 보니 전원구조가 오보, 사람들은 구하는 중이고 , 빠른 유속으로 세월호가 빨리 가라앉고 있다고 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업무에 집중이 되지않았다. 업무 중에 계속 뉴스를 확인하게 됐고 점점 절망으로 덮여갔고 결국 세월호가 침몰했다. 우리의 꽃들은 그렇게 억울하게 져버렸다. 모든 국민이 그 날을 트라우마처럼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박근혜에게 묻는다. 7시간 뭐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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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봄바람이 불다가차가운 바람결이 스치던 그 날벚꽃이 한창예쁘게 흩날리며어여쁜 아이들이함께 떠나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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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의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수업이 없어서 그날은 집에 있었습니다.집 아래층이 엄마가 하시는 카페였어서 느즈막히 정리하고 카페로 내려왔었죠.지역이 지역인지라 평일 아침엔 손님이 없어 직원이모가 TV를 틀어놓고 계셨는데, 제가 내려오니 큰일이라며 얼른 티비보라고 하시더라구요.뭔 일인가 싶어서 같이 보고 있으니, 제주도가던 배가 침몰이 됐답니다.기울어져가는 배는 아직 하얀 윗부분과 파란 아랫부분이 다 보이는 상황이라 그래도 금방 구하겠거니 했습니다. 이미 기울어진 배를 이렇게 실시간으로 속보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그러면 누구든 달려가 배 안의 사람들을 구할거라고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그리고 얼마 후, 전원구조 라는 자막이 나왔고 저와 이모는 실시간으로 모든 내용을 보고 있었죠. 아마 YTN뉴스였을 겁니다.그리고 당시에 사귄지 겨우 4일 된 남자친구와도 카톡을 하며 세월호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못 구했대, 어떡해, 배 점점 가라앉는다....세상에, 민간잠수사들과 해경, 미군들까지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잠겼습니다.그 시기 물타기를 하고, 선동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나요. 일단 사람먼저 구하고 선동해도 늦지 않았을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겨우 한 달, 아니 일주일 전에 뭘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2년 전 그 날은 아직도 생생한 듯 기억합니다.잊지 못합니다. 잊으면 그렇게 잠겨버린 영혼들에게 죄스러울까봐.저는 기억합니다. 그때 우리 정부는 도움의 손길을 마다했고, 얼마나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었는지를.지금이라도 제발, 사람 목숨을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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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분식점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신포 우리 만두였을 겁니다. 티비에 기울어진 세월호가 잡혔습니다. 구하기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니까 크레인을 가져와서 조금 더 오래 떠있을 수 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배들로 주변을 둘러싸고 파도가 덜 들이치게 하면 되지 않을까?" 눈 앞에 배가 떠 있었고 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바다에서는 저체온증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던데 다들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뒤 저는 팽목항에 기부금을 보내기 위해서 동기들에게 홍보하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글을 쓰던 떨림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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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점심때쯤 엄마와 동네 김치찌개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맛있어서 자주 가는 곳인데 그날따라 엄마도, 나도 밥맛이 없었다. 깨작거리며 밥을 먹고있는데 식당 텔레비전에서 뉴스속보가 떴다. 진도해상에서 단원고 학생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그리고 전원구조했다는 뉴스 속보였다. 헤드라인 뒤로 뒤집혀진 세월호가 보였고, 엄마와 나는 "다행이다.."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한두달 내내 끔찍하고도 슬픈 뉴스가 계속 됐다. 실종자 수가 줄어들면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시간이 지날 수록 함께 슬퍼했던 사람들은 어째선지 지겹다라던지, 보상금 운운하며 유족들에게 씻을수없는 상처가 될 말들을 하며 세월호 뒤에 감춰진 진실과 그들의 슬픔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난 더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기억하고, 기억해서 아이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하루에도 수백번 기억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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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학교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하루종일 수업,수업, 쉬는시간엔 대본외우기에 바빠서 핸드폰 한번 들여다보니 않았다. 점심시간이였나 친구가 페이스북을 보며 "야, 배 침몰했는데 전원구조래. 근데 진짜 멋있는게 남학생들이 여학생들한테 구명조끼 벗어줬대"라는 말을 했다. "우와, 다행이네"라고 대답하고 다시 대본을 외워나갔다. 그날 발표는 7시가 지나서 끝났고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날보단 일찍 끝났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 친구와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 들렸다. 근데 문방구 주인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어떡하냐"고 했다. "전원구조잖아요?"라고 말하며 문방구 안에 있는 티비를 보는데 숫자가 이상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200명/200명이 보였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갔고 실종자 수가 줄어드는 안타까운 뉴스를 보다 내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았을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하루동안 나의 삶이 쓰레기같이 느껴졌고 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페북의 허위글 하나에, 언론의 오보에 안도감을 갖었던 것도, 괜찮을거라는 믿음을 갖었던 것도, 모든 것을 의심했더라도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었던게 없었단 것도 정말 죄송했고 부끄러웠다. 며칠을 내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죄송하며 보냈다. 사실, 그래서 지금 더 화가 난다. 난 대통령이 7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근데 내가 더 궁금한건 한낱 고등학생도 그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아는데 대통령이 그걸 모르냐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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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4년 4월16일 초등학교에 학교폭력예방교육을 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갔다가 배가 가라앉고있다는 뉴스를 듣고그때까지는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구조하겠지하는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 뒤 전원구조했다는 뉴스를 듣고서 다행이다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믿을수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천만 국민들이 보는앞에서 삼백명넘은 우리 아이들을 실은 배가 바다로 빠져들어갔다. 우리 모두가 빤히 보고있는 앞에서 빠져들어갔다. 그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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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저는 호주에 있었어요. 워홀러 였거든요.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집에 가던중 포털사이트에서 세월호 소식을 봤어요.처음 본 기사는 사망자수도 적었고 구출중이라는 기사였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이 아니라는걸 알았어요. 많은 아이들이 세월호 안에 있었고 구조는 이루어 지지않고 민간잠수부들의 잠수도 통제 했다는 기사들...당시 답답하고 화가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 있는 사람들 보다는 덜 걱정했던것 같아요.5개월 뒤에 한국에 돌아왔을때 사람들을 만날떄마다 세월호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리에서 교복입은 아이들만 봐도 눈물이 차올랐다는 선배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해외에 있었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잊고 지낸날들. 진실을 찾아보지 않은 날들.미안합니다.잊지 않겠습니다.거짓말은 진실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아이들을 차가운 바닷속에 남겨둔 그들에 입에서 그날의 진실을 들어야 하고 처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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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그 날은 아주 평범했던 날이였다. 평소처럼 친구들과 오늘 점심은 뭐야? 이번에 너네 컴백한다며?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다른 날과 다른 건 없었다. 밥을 먹고 졸려서 졸다가 혼났고, 쉬는시간에 과자를 먹었고, 그렇게 학교가 끝났다. 평소처럼 네이버에 들어가 실시간 검색어를 봤다.다른 곳에선 내가 웃고 있던 그 시간에, 내 또래는 울고 있었었다.언제나 그랬듯 정부는 무능했고 또 무능했으며 한없이 무능했다.그게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너무 화가 나서 울었다.내가 할 수 있는게 고작 집에서 뉴스 보는 것 밖에는 없어서, 그 뉴스를 보고 같이 울고 화내는게 전부라서 그게 너무 미안했다.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그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리는 그 날만 이야기 했다.하지만 이제 그 때를 기억 해 주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내가 항상 하고다니는 세월호 팔찌와 배찌, 휴대폰 상단바에 있는 노란 리본을 볼 때면 " 아직도 하고 있네? " 라는 소리 뿐이다.그게 너무 서럽다. 우리가 이렇게 바보같아서 내 또래들이 그렇게 간 것 같아서.내 대학선배가 됬을, 내 직장 상사가 됬을, 나와 마음맞는 친구가 됬을, 그리고 내 동반자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친구들이 그렇게 떠나갔다는게 난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우리라도 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