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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전원구조라고 하여..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사고당한 학생들도 일반인들도 정말 다 무사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번 수학여행은 절대 잊지 못하겠다고 웃어넘겼습니다.제가 세월호의 사고를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정부가 발표한 전원구조라는 치명적 오보를 그 당시에는 한치의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사람이라도 부상 당했다면 웃지 못했을겁니다. 한사람이라도 돌아가셨다면 더더욱 웃지 못했을겁니다. 제가 그 시간에 웃었던 게 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생각납니다. 죄송스러워서요.배 안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난리가 났는데 그 시간에 속없이 웃던게 너무 죄송해서요..언론은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원구조라고.... 지금도 이해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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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16일입사한지 이제 6개월쯤 지났을 무렵여느날과 같이 교통지옥을 벗어나 사무실로 와 앉았다. 메일을 확인하고 녹색창 사이트를 열었는데 하나같이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사건사고가 좀 많은 나라이던가..하루 달리 새로운 일들이 터지는 대한민국에서 대수롭지 않게 뉴스를 클릭했고, 전원구조 이야기에 안도하고 다시 업무를 보았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선배의 "헐"이라는 탄성을 듣기 전까지는 나에게도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여전히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같은 날이 아니었다.그날 점심시간까지도 DMB를 틀고 다같이 돈까스를 먹었던 그 날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잊지못할 다른 날이었다.노란색 리본에 대해 깨닫고카톡 프사를 노란리본으로 바꾸고페북 타임라인에 장식된 노란색 리본들을 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누군가 그랬다.대한민국은 국민정서가 냄비라고. "한 삼개월지나봐라..다 잊은듯 살거다.."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빡쳤었던 기억이 난다. 근데 벌써 2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물에 갇힌 세월호는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 있고 누군가의 동생일, 누군가의 친구일 그들 중 몇명은 아직 얼굴조차 되돌려받지 못했다. 헬조선이 고조선이 된 지금나도 기억하고 그도 기억하고 우리도 기억하는 그날의 소중한 7시간을 고스란히 여기에 바친다. 있던 정 없던 정, 앞으로 생겨날 정도 다 없어지고 뭉개져버린 지금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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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산에 있었다. 아침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한다는 말을 듣고.. 뭐지... 라는 .. 나의 첫반응.. 곧 이어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듣고는 "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이구나" 라는 생각. 점심을 먹고 단원고를 지나오는데 이 세상 기자는 다 단원고에 있었던 것 같다.. 들어와서 들은 소식 어린 승무원과 학생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전원구조는 오보라는 보도... 눈물이 났다. 다음날 학생들이 병원으로 오기 시작했다. 싸늘한 몸으로 ... ....정신 없이 제자를 맞이하는 선생님,.. 친구를 맞이하는 아이들...언니.. 오빠를 보는 동생들... 밤새 오열하는 할머니................. 나중에는 눈물도 나지 않는 않았다.... 몇달뒤... 한 여학생이 부모님의 속을 오래 태운 뒤 수습이 됐다.. 그때 봤던.."돌아와서 고마워.. ㅇㅇ야." 잊혀지지 않는다... 잊을 수 없다... 안전한 사회가 되고 모든 어머니 가슴의 상처가 아물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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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매일매일 자소서와 시험에 치여 지내던 평소와 다를게 없던 날이었습니다 쉬는시간에 평소처럼 페이스북을 보다 세월호 사건을 들었고 다른 어떤 감정이 아닌 충격만이 같은 반 학생들을 느꼈습니다 정말 다를게 없던 날, 평소와 같은 그런 날 겨우 저보다 한두살 어린 학생들의 꽃이 꺾여버렸습니다 매일매일 길을 지나다니면 보이는 세월호사건에 대한 운동을 보면 그저 미안 할 뿐입니다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날 나는 무엇을 한 것 일까요 난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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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기억한다.출근을 한 뒤, 인쇄를 맡기러 근처 인쇄소에 갔었다.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뉴스는 생각보다 긴박하지 않았으며 나 또한 당연히 전원 구조가 될 줄 알았다. 너무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해지는 속보들은 점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기만 했다.도대체 왜? 라는 질문만 되뇌이며 답답해 했다.그리고 결국,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국민들은 모두 아팠다.당시 공연기획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세월호 참사 추모로 인해 모든 공연들은 연기가 되거나 취소가 되었다.몇일 남지 않은 공연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티켓을 구매한 분들 한분한분께 전화를 드렸다.천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왜 미루냐며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렇게 대한민국은 아팠지만대한민국의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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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스마트폰으로 세월호 침몰, 승객 전원구조라는 내용의 제목 기사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월호가 원양어선 쯤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끔 나는 배사고...구했다는 사람이 수백명이나 될것이라 생각못하고 출근했다. 오전 근무 중 누군가 메세지 창에 배가 침몰해서 구조중이라고 했다. 모두 구조한거 아닌가? 하니 아닌것 같다고 했다. 다시 기사를 찾아봤다. 구조 기사는 오보였고 그 배는 여객선이었고 너무나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다. 점심을 보며 먹는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 줄 모르며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퇴근 후 티브이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정말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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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도덕수업 중이였는데 선생님끼서 큰 배사고가 났다고 했었다 나는 당시 별생각이 없었지만 학교수업이 끝나고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보니 정말 큰사고여서 놀랐고 걱정했다 나랑 비슷한나이인데 그런 슬픈일을 당한 언니오빠들이 너무 안쓰러웠고 내가 대신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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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구조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기억오보라는 소식에 믿겨지지 않던 기억점점 가라앉는 배 주위로 돌아만 다니는 해경에 답답했던 기억대통령이란 작자는 늦게 나타나 구명조끼 타령이나 했던 기억가슴 한켠에 깊은 상처가 났다.그 상처는 흉터로 남았고 볼때마다 상처의 기억에 아팠다.그래서 기억하길 피해왔다. 흉터를 보고 싶지 않아 덮어두었다.적어도 당신들은 나보다 큰 흉터를 상처를 가졌어야 한다.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모른다고?백만개의 촛불로 달군 쇠도장으로 낙인 찍히면, 그때는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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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생자들과 같은 나이인 97년생이다 고등학교 2학년, 우리도 똑같이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었고 그날은 음악 수행평가가 있었다. 평소 무음으로 해놓던 스마트폰이 그날따라 진동으로 설정되어있었는지 수행평가를 마치고 자리에 앉을때 지이잉 하고 울렸다 세월호 침몰 속보였다 그들이 배에 갇혀 살려달라고 외칠 때 나는 합창을 했다 대통령은 뭐하고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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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도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근무중이었고 미안했고 분노했으며, 퇴근후 바로 집에와서도 tv앞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게 미안하고 미안해서, 차가운 물속에서 너무도 무서웠을 아이들 생각에 하염없이 울기만 했던.. 그날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인지,어떻게 아이들이 가라앉을 동안 어른들이, 이 나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그리고 2년이 흐름 지금도 너무나도 미안해서 가슴이 먹먹합니다. 사라진 7시간의 진실이 중요한건 그 것을 알아야만이 또다시 이런 재난앞에서 무기력해지지 않고 내가 사는 이 나라가국민을 소중히 여기리라는 희망을 가질수 있는 기초가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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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과 봄 산행을 하려고 팔공산 가산산성 에 올라갔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직원들을 기다리며 입구 의자에 앉아 있는데. . 누군가 배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배가 기울어져 가라앉았다고 다행해 사람들은 구조되었다고.. 그리고 산정상까지 산행을 하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와서 밤 늦게 텔레비젼을 보는데.. 왠걸 사람들이 구출된것이 아니었어요.. 전 가산산성만 아니 팔공산만 지나가도 세월호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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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저는 중학교 1학년이였고 중학교 생활에 적응 하고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직은 어색한 아이들과 급식을 먹고 평범히 학교 생활을 하다가 담임선생님이 종례 할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유난히 종례가 긴 선생님셔서 또 집에 늦게 가겠구나하고 종례를 듣다가 선생님이 처음 저와 저희반 아이들에게 세월호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낮에 뉴스를 보니까 수학여행 가던 배가 침몰해서 학생들이 큰일이났다. 2년 반은 지나서그런지 기억이안나지만 대충 제가 쓴 내용이 맞을겁니다. 아무튼 그때처음 세월호 얘기를 들었고 선생님도 일하시는중에 뉴스를 보셔서 그런지 세월호얘기는 많이하지않았고 평소대로 종례를 하셨습니다. 저는 세월호얘기를 듣고 ... 아니, 그때 기준으로하면 수학여행가다가 배가 침몰한 얘기로 바꿔야겠죠. 그얘기를 들었을때 저는 아침마다 뉴스를 봐왔었는데 그땐 뉴스를 안본건지 뉴스에 안나온건지 세월호 얘기를 뉴스로는 못봤습니다. 그래서 큰일이 아니지않을까 생각하고 하교해서 집에오니 ...보통 큰일이 아니더라구요. 뉴스를보니 같은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앉아서 말하고있고 그배가 뒤집혀서 가라앉는 영상이랑 사람들이 나오는 영상 그중에서 제일 놀라고 눈길이갔던건 오른쪽상단에 계속써있는 구조자 사망자 실종자 명수가 써있는 자막이였습니다. 제가 필력이 좋지않아 그날의 7시간을 제대로쓴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때도 어렸고 아직도 어린 제 기억으로 채워나갔습니다. 우리는 기억하는데 이나라의 대통령님이 기억하지못하는이유가 있을까요불행히 하늘나라로가버린 안산단원고 선배들은 이 시국에 편히 잠을 자고있는지 의문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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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기숙사에서 아침 먹다가 뉴스를 봤습니다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 수백명이 타고 있던 여객선이 침몰중이라고..곧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확인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 다음날 아침을 먹을 땐 차마 TV를 못쳐다보겠더군요.. 밥먹는것도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하지만 그 후로 뉴스에선 점점 세월호 소식이 줄었고주위에서도 지겹다 그만해라 라는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유일하게 계속 팽목항 소식을 들려주던 JTBC를 찾아보면서 제발 그들을 찾아주기를 바랐지만 어쩐지 국가는 그들을 외면하는것 같더군요그들을 유기한 국가와그들을 비웃은 국민들모두 기억해야 합니다틀린건 틀렸다고 말해야합니다정의를 말할 수 없는 사회는 얼마나 부패한 사회입니까떠올리기도 힘들고 아픈 시간이지만 기억합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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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마감을 앞둔 때였습니다. 제법 부수가 많은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죠. 20일 전후가 마감일이라 눈 코 뜰 새 없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선박이 침몰했다는 기사가 올라 왔습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구조’라는 뉴스가 올라오기 시작했지요. 당연하겠지, 그렇게 큰 배가 침몰할 리가 있어?라며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일생에 한번뿐인 수학여행을 망쳐 속이 좀 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어 11시30분 조금 넘어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전원구조로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그때 점심으로 수육에 만두전골을 시켰습니다만 우리는 누구도 그것을 먹지 못했습니다. 음식점 텔레비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월호 소식에 모두들 숟가락을 제대로 들 수 없었던 거죠. 그 후 저 또한 상식적인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의 두세 달 간은 세월호 트라우마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날 그 시간은 그렇게 제 기억에 박제된 채 지금도 오롯하게 떠오릅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4월16일과 세월호, 단원고의 눈 맑은 아이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이 어서 잊히기를 바라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그 날은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가장 작은 헌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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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 영국에서 나는 부활절을 맞았다. 내가 다니는 성공회 성당은 그 날 주교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날 설교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대체하셨다. 그 분은 이 성당에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배후에 그 분은 나를 찾았다. 누군가 한국인이 있다고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작은 마을에서도 거의 모두가 내 손을 잡고 마음 아파했었다.내 나라의 대통령은 그 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유가족들은 무려 2년 반을 울었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_"세월호 당일 간호장교 2명 "청와대 상근"..왜 숨겼나?"서복현 입력 2016.11.28 22:00 수정 2016.11.29 01:25/ Daum 기사에 있는 catlover8님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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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제가 공부방 을 열기 위해 해당 공부방 교육을 들으러지방에 가 있었던 때입니다. 쉬는 시간중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게 되었고 그날은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구조는 됐는지 인터넷기사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오보를 보며 잠시 안도했고 그것이 잘못된 소식이라는 걸 다시 알게 되고 ... 8시 수업을 마치고 방에서 뉴스를 보면서 동료들과 함께 울었네요. 그리고 며칠동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 커다란 아픈 현실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없는 무기력한 스스로를 탓하면서요. 지금이라도 꼭 밝혀져야 합니다. 아니라고 말만하지 말고 7시간 동안 뭘했는지 밝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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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속보로 보던 수학여행 가던 세월호 침몰 소식...회사에서 팀 주간회의와 프로젝트 회의하면서 간간히 검색하던 뉴스 속보...나의 2014.04.16일은 그렇게 기억납니다.설마, 애들 구조되겠지....하면서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보내고 있던 그날...2년전 Planner를 보니...진급회식까지 있었더라구요. 어렴풋이 기억납니다.하루종일...어떡하지...를 머릿속으로 되뇌이면서 속보만 보던 기억...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개운하지 않은 변명들...그날이후 2년이 훨씬 지났지만...아직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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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그날 단발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긴 파마머리 였던 것 같기도 하고.날이 화창했던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왔던 것 같기도 하고.하나 만큼은 선명히 기억난다.뉴스를 평소에 보지 않던 내가 꽤 오랜 시간 마음을 졸이며 뉴스를 봤고 외출 전 전원구조라는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며 집을 나섰다.집에서 돌아온 후는 생각하고싶지 않다.하지만 생각해야 한다.다시는 절대로 되풀이 되서는 안되는 참사.내가 할 수 있는건 많지않다.그 날을 잊지않으려 이렇게 되새기는 게 그중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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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시각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회사 업무차 카타르에 가서,숙소 다른층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면서티비에 나온 세월호를 보았습니다.그때가 한국 시각으로 점심 전쯤이었고, 천천히 가라앉길래 "에이 다 꺼냈겠네" 라고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가서 업무를 봤습니다.제 기억력은 절대 좋은편이 아닙니다만,아직까지 식당 풍경, 티비의 위치, 제 생각이 그대로 기억납니다.저는 기억합니다. 그날 그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있습니다.다른분들도 저와 같을거라 생각합니다.제발, 더이상 손바닥을 하늘로 가리려 하지 마십시오.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천벌 받기전에, 제대로, 지금이라도..마지막으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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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아이 어린이집 보내고 갓태어난 둘째아이모유수유 중이었어요. 집에 계시던 도우미이모님이 티비 좀 켜보자고 급하게 말씀하셨죠. 처음엔 모두 구조되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이모님은 다시 주방으로 가셔서 아침을 차리셨죠. 누구도 몰랐을거에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오지 못하고 있었을줄은. 모두 믿었겠죠. 구해줄 거라고. 그 날뒤로 저는 아이를 낳은 기쁨을 마음껏 느끼지 못했어요. 가슴이 답답했고 아이를 안고 눈물을 많이도 흘렸죠. 내가 낳은 이 작은 아이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암담한 마음이었어요.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우리의 미래도 가라앉아버린 마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