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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25살, 취준생의 신분이였고, 카페 저녁마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마감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아침 늦게 눈을 떴고, 어머니의 재촉에 거실 탁상에 앉아 식사를 마칠 무렵이였습니다.어머니가 보시던 아침 프로그램이 속보로 바뀌고, 세월호의 보도 내용이 나왔습니다. 배는 이미 반 이상 기울어 있는 모습에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던 길이라는 내용에, 열일곱살 고등학생 동생을 둔 사람으로 더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이 얼른 구조되어 나오기만을 바랬습니다. 불안한 시간이 흐른 후, 전원 구조기사를 접하고 마음을 놓은것도 잠시전원구조 기사가 오보임을 깨닫고 얼마나 허망하고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어린 학생들이 죽어가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까지 뉴스를 봤습니다. 뉴스에서는 선체가 뒤집혀서 가라앉는 모습이 속속 나왔지만, 구조는 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갔을 때, 마주친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마음이 무거웠던것도,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가벼운 농담을 건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지다가, 둘 다 죄책감을 느끼고 숙연해 졌던것도 모두 기억납니다. 일상을 누리고 살아가던 순간순간이 그날은 모두 죄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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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날 컬투쇼 공개 라디오를 들으러 갔었어요. 신났습니다. 연예인을 그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신나게 떠들고 정답도 맞추고 하고 있는데 컬투분들이 안내를 해주셨어요. 침몰한 배에 탑승했던 전원 구출이라고요. 안심이 되고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속보는 거짓이었어요. 점점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라디오 분위기는 점점 가라 앉았고 결국 그날 녹음은 전파를 타지 않았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겼는데 즐거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금방 구출될 줄 알았는데....내 나라가 이렇게 무능한지 몰랐습니다 개탄스러웠습니다.. 추운 봄바다 ...나는 따뜻한 방송국에서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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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나는 하루하루가 바쁜 고3이였다. 회장이었던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교실과 교무실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고있었다. 교무실엔 커다란 TV 2대가 있었고 그 TV에선 학생 전원구조라는 헤드라인이 걸린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보자마자 "헐- 다행이다 진짜... 큰일날뻔했어..". 그리고 반에 올라가서 친구들에게 이런일이있었는데 모두 구조됬데. 다행이지않아? 큰소리로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전원구조는 오보였고 친구들은 차가운 바다에 잠겼다. 하루종일 아니 일주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날을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세월호관련 글들을 보았다. 하루하루가 정말 슬펐다.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때의 나는 거의 일주일을 울며보냈던 것같다. 난 그 친구들을 잊지않았고 앞으로도 잊지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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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에이. 설마 라고 하며 뉴스를 보던 기억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절대 잊지않겠습니다.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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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들은 심해속으로 묻으려했다.아이들의 미래를 묻었다.알량한 목소리로 진실을 숨겼다.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 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들이 쉽게 멎게한 숨결을 우리는 기억한다.잊지 않는다, 잊지 못한다.그 차가운 바다 속에서 우는 아이들에게제발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를 빈다.안식을 ...평온을. ..살아남은 자와 그 들에게 죽임당한 자들 모두에게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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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 아무도 알아주지않아 슬펐던 제 생일, 세월호의 침몰을 접했습니다. 그 회색 날의 마지막 하루를 마치는 제 침대에서 기숙사 룸메이트들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사실 개인적인 투정과 섭섭함이었고, 300이라는 수의 답답함이었어요. 일년마다 돌아오는 생일마다 이제 곳곳에 노란 리본이 걸립니다. 우울했어요 생일마다. 그냥 그게 전부였어요. 어쩌면 정말 개돼지일지도 모르는 저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세월호도 외면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지금 세월호 학생들과 유가족분들. 진심을 다해주신 몇몇 국회의원 분들에 비해 저는 얼마나 초라한지요. 이제 저는 그 때의 고 3이 아니라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참정권을 지니며 스스로 생각할 지식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그들이 떠난 날을 잊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세상을 배우고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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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대한 무기력함이 지속되던 그 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하루를 지새우고 모두가 출근을 하는 그 시각에 나는 잠을 청하려고 하였다. 분명 하루를 샜는데, 잠이 오지 않아 자연스럽게 티비를 틀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 뉴스 속보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던 이유는 "전원 구조" 라고 보도되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후 잠이 들었고, 눈을 뜨자마자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보니 "전원구조 오보" 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차가운 바닷속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었고, 그에 대한 정부는 어떠한 대응도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뉴스를 보는 내 마음은 한없이 말라갔다. 1분 1초가 아까운 그 시간, 생존자수는 변함이 없고 사망자수는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늘어났다. 세월호에서 세월이 멈춰버린 그들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고, 소중한 딸이자 아들인 우리 모두의 가족이었다. 언론은 전 국민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거짓된 희망만을 심어놓았다. 그 희망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고 304명의 사람들이 세월안에 갇혔다. 기적을 꿈꾸던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피할수도 돌이킬 수 없는 이 사고를 자꾸만 잊으라고 한다. 우리의 시간은 그 때부터 멈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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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통화중에 사고 소식을 들었는데 티비를 틀으니 아이들이 거의 구조되었다고 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보였다는 것을 얼마지나지 않아 알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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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경찰이 잘 구해주겠지라는 안일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책임한 정부와 선장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언니 오빠들이 물속에서 깊은잠을 자게되었습니다. 그때 언니오빠들의 나이 18살, 지금의 제 나이 입니다. 돌아왔다면 지금쯤 사회초년생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고 싱그럽게 살아가야할 우리나라의 소중한 국민이고 희망이고 인재였습니다. 더 빨리 진실을 깨닫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더 빨리 나서지 못해 죄송합니다. 언니오빠들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우리나라를 바로잡겠습니다. 하늘을 나는 고래위에 희망의 등불을 수없이 놓아 깊은 바다속에서도 빛나고, 따뜻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잊지않겠습니다. 계속지켜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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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그 날은 9년 전 세상을 떠난 오빠의 기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약간은 무뎌졌지만, 여전히 무거운 마음을 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분주한 출근길에 나섰다.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 하는데, 직원들 사이에서 기사 봤냐는 이야기가 하나씩 터져나왔다. 업무 중인 컴퓨터 한 켠에 작게 속보가 올라오는데,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배가 기울어 구조 중이란다. 그러더니 금새 전원 구조라 해서 다들 정말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또 다시 오보라며 기사 내용을 번복하고 배는 침몰 중이고 많은 이들이 기울어져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있단다. 그때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뉴스를 찾아보게 되고 실시간으로 뜨는 속보를 보며, 점점 형태가 사라지는 세월호를 보며 아침부터 무거웠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 날 밤은 잠을 설쳤다. 누워서 내 방 창문을 보는데, 내 방이 기울어지는 느낌이 계속 들었고 천장에 되어버리는 저 창문으로 어떻게 기어올라갈 수 있을까, 물이 점점 차오르며 숨이 막히면 난 어떻게 할까를 스스로 물어보느라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항상 듣던, 전현무가 진행하던 유쾌한 라디오의 오프닝 곡으로 마이클잭슨의 "you are not alone"이 흘러나왔고, 아침부터 왜 이렇게 무게를 잡지, 하며 생각하는 순간 침몰한 세월호 생각에 아차 했다. 난 그래도 잠을 설쳤지만 아무렇지 않게 아침을 맞이했는데, 가족들은 어젯밤부터 한숨 못잤겠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아이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한 명이라도 살아돌아오길 기도했다. 그 후로 매년 4월 16일은 오빠의 기일과 함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게 된다. 모두 천국에서 행복하길. 뒷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그저 행복하게 지내길. 나의 오빠도,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도,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 좀만 기다려줘. 그저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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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평소와 같은 별반 다를일 없던 날. 똑같이 학교에 가고 똑같이 수업을 듣고 졸고 아무 이변도 없던 하루. 배가 침몰했지만 전원 구조 했다는 소식에 다행이다 싶었던 오전. 아빠 심부름을 가려고 현관문을 나서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두 자릿수를 넘어갔던 오후. 시간이 지날때마다 늘어나는 숫자에 멍하고 믿을 수 없던 밤. 휴대폰만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무너지는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가 너무 답답하고 바다가 미웠던 하루. 제발 한명이라도 살아돌아오라고 빌었던 일주일. 팽목항이 진도가 단원고가 아픈 단어가 되었던 그날. 4월 16일. 잊을 수 없는 그 날.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공허한 가슴과 시린 눈. 잊지말자 2014년 4월 16일 ~ ing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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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시험기간이라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집중이 안되서 여기저기 뉴스를 보고 있던 중 세월호 사고를 접하게 됬죠. 언론을 너무 믿고 우리나라 구조 시스템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요.. 당연히 전원구조 될거라 생각하고 몇시간 후에 다시 인터넷을 들어갔는데 세상에.. 숨이 턱 막히고 눈물이 나더라구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우리는 기억할게요 4월 16일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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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수업을 듣던 중 선생님께서 "우리가 작년에 제주도갈때 타고갔던 배가 오늘 사고가났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고 그 안에 있던 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웟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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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법과정치 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서 지금 너네 또래 애들한테 큰일이 생겼다며 같이 뉴스를 보자고 하셨습니다. 뉴스에선 세월호 사건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장소로 가고있던 친구들이 저렇게 커다란 배 안에 그대로 갖힌 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생중계해주던 모습으로는 배가 거의 가라앉지 않고 있던 상황이어서 곧 구출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전원 구출 속보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수업에 임했습니다. 걔네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배 전복 사고라니 인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걸 하필 마지막 수학여행 때 겪다니, 우리는 비행기로 가서 다행이다, 따위의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 즈음 몰래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애들이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아직도 친구들이 그곳에 갖혀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수업을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자 시간. 몰래 친구들과 DMB로 뉴스를 보았는데, 엄마아빠들이 많이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장난치는 그 사이, 그 친구들은 물과 사투를 벌이다 결국 스러지고 만 것입니다. 온몸에 찬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11시 반, 야자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 엄마는 세월호 뉴스를 보며 울고계셨습니다. 내가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며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셨습니다. 엄마는 저 부모들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하는 말도 하셨습니다. 다같이 구조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둑해진 밤바다에서 세찬 물결과 싸우는 게 쉽지 않을텐데, 그 상황에서까지 힘내시는 어민분들, 구조자분들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다음 날도 학교를 가야했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을 안고 잠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온 나라는 노란 물결에 뒤덮인 초상집이 되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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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었던 나는 그때 체육시간이었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수업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누워있었다. 핸드폰을 하다가 네이버에 들어갔는데 큰 배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들에게 말을 했고 모두 놀라 황급히 일어났다. 하지만 곧 있다가 배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 기사에서는 배와 비행기, 구조대의 이름, 수까지 모두 자세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모두 구출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안도감을 가지고 나머지 수업을 들으러 갔다. 하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정부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 아니 구하지 않았다.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때 내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 한마디로 평생 세월호에서 무서웠을 친구들에게 큰 빚을 졌다. 나는 친구들에게 기사를 보여주며 "이거봐 이렇게 많이 출동했대, 사람들 못구하는게 이상하다. 다 구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내가 미안해... 절대 잊지 않을게. 절대 지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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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수업 동기들이 사고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전원 구조일 것이라 했다.수업에 끝난 후에야 그것이 오보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 근처 카페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휴대폰을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공부를 하거나 펜을 끄적거리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유리창 너머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초조한 마음이었으나 부끄럽게도 방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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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후 사내 까페에 동기들과 커피를 사러 갔다가 티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전원을 구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뒤 뉴스에는 2명 사망이라고 떴던 것 같습니다. 동기들과 "시키는대로 했으면 안 죽었을텐데, 꼭 말 안 듣고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대화를 했습니다. 수백명이 탄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인원 파악이 어쩜 그리 빨리 되어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떴는지 의아해하지도 않았으며, 끝까지 시키는대로 그대로만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간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전원 구조도, 2명 사망도 아닌, 아이들이 있는 배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잠겨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습니다. 뉴스에서는 같은 내용만 수백번 반복되었습니다.그 날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소중한 촛불을 계속 켜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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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쉬는 날이라 미용실에 갔다가 미용실에서 틀어놓은 티비 뉴스에서 세월호 소식을 접했고, 곧 이어진 전원 구조 소식에 안도했다가 곧이은 정정 보도에 미용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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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와 기념일이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식사를하고있었는데 세월호 사고에서 전원구조완료라는 속보를보고 큰일날뻔했는데 다행이라고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보라는소식을듣고 너무놀라고 무서웠습니다.. 그때는 단순히 삼풍백화점처럼 큰사고가났다는생각뿐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요.. 며칠간 기적이일어나길빌고빌었는데 어느새 2년이라는시간이흘렀습니다. 생각하지않으면 잊혀지더라고요 심지어 세월호 참사에 정치를들먹이기도하구요. 정말이건아닌것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기억해야하고 진상조사도해야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작게나마 도움드리고 기억하며 살아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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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삽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가족과 함께 영국여행을 떠나기 전 날이었어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습관처럼 태블릿을 열어 본 언니가 배 침몰 소식을 알렸습니다. 시차가 있는 지라 그 때는 이미 한국시간으로 오후였죠. 사건사고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저는 "이미 다 죽었겠네"라고 무관심하게 한 마디 하고는 제 할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내내 수시로 한국상황을 체크하고 그랬던 걸 보면 저도 내심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광화문 세월호천막에 갔었는데 감히 위로의 말씀조차 드릴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영정 앞에서 눈물만 훔치다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가족 여러분들 힘내세요.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