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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그날을 기억합니다. 너무도 또렷이,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수학여행이란 단어때문에 컴퓨터로들여다본 뉴스에서 배 하나가 뒤집혀진 화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인터넷 검색어에서 "수학여행"이란 글자가 보였습니다 무슨일인가 하고 봤더니 커다란여객선이 뒤집혀져있는 데 수학여행학생들이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집에있는 우리 딸아이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아이가 떠오르고 배안에 있을 아이들이 떠오르고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그날부터 저는 일주일넘게 눈물흘리며 TV를 봐야만 했습니다............모든 엄마들이 그러했을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러했을것입니다. 그날은 대한민국국민 모두가 기억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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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평범한 생활 중이었습니다. 통신기기가 없어 아무런 상황도 모르던 중, 마침 교무실이 저희 교실에 바로 옆이어서 선생님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몇 친구들과 달려나간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TV 속보를 보며 탄식과 걱정의 말을 하셨고 그렇게 저와 친구들은 학교에서 제일 처음 세월호 사건을 접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속보를 보고서 수학여행을 하던 학생들이 있다는 말에, 다른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수학여행을 간 상태였는데 중간에 배를 탄다는 말을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덜컥 겁이 나 휴대폰을 안낸 친구를 수소문해 전화하고 괜찮냐 묻고 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 수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몇명은 울기도 했고 계속 구조자는 없는가 대체 선장은 무엇을 했는가 왜 사고가 났는가 일상이 불가하였습니다. 이미 2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잊혀지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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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나는 그 날은 고등학교 수련회를 갔다가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날이었는데 휴대폰을 받자마자 너무 놀라서 친구들이랑 모여서 인터넷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부모님한테도 연락이 와있었고 집에 와서는 가족들이랑 계속 뉴스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누구에게는 기억나지 않는 7시간이 수십수만명의 사람들한테는 평생 잊지 못할 다른 의미의 7시라는게 너무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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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취업준비생이었고, 같은 회사를 지원한 사람 몇과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그 날의 스터디는 신촌역 근처 카리부 커피에서 10시에 있었다.자리에 막 앉았을 때 나보다 한 살 위인 언니가 제주도 가던 유람선에서 사고 났대요, 라는 말을 했다. 그리곤 그런데 다행이 모두 구조되었대요 하고 덧붙였다. 그 날 우리는 오늘은 좀 추운 거 같아요, 이제 여름이 오려나 봐요, 라는 날씨 인사 대신 그 뉴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생기네요. 하고 말했고, 우리는 타이타닉 사고 같은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터디가 끝난 뒤에 내가 집으로 바로 갔는지,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단원고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를 보고 울었고, 나 아직 살아있다며 단원고 학생인앙 거짓 문자를 보낸 아이 때문에 아 누군가 살아 있겠구나 하고 희망을 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지리하게 반복되는 취준생의 나날 중 하루였을 뿐이다. 그 날의 기억은 남은 게 없다. 세월호를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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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강이라 집에서 자고있는데 아빠가 배사고가 났다고 자세히 알아보고 연락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전원구조 라는 속보에 안심하고 아빠에게 전화해 소식을 전했습니다 얼마뒤 오보라는걸 알게됐고계속 뉴스속보를 보면서 신한테 기도 했습니다살아서 돌아오라고전 그날 자면서 두고있던 고개 방향조차 기억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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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시험 전날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다가 핸드폰으로 사고 기사를 봤고 바로 전원 구조 기사까지 확인하고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도서관 지하 1층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다잠깐 나와서 엄마랑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그러시더라구여 기사 봤냐고사촌 동생이 다니는 옆 학교 애들이라며 전원구조 떴드라 다행이다.그러고서 전화를 끊었습니다.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하지만 그 뒤로 뉴스만 보면 울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부터, 생존자가 또 나왔는지 확인하는게 우선이었습니다.이렇게 아직도 선명한 기억을 어떻게 국민을 위해 일한다던 사람들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하시나요 전국민을 슬픔으로 빠트렸던 그 사건을 그 날을 많이 늦었습니다 희생자 분들 그리고 희생자분들의 가족들에게 죄송하지도 않습니까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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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저는 직장인이지만, 그 당시에는 과제에 묻혀 학교에서 밤을 새던 3학년 대학생이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밤을 새고 다음 날 아침까지 과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고 아침에 동기들과 함께 세월호 소식을 들었었습니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었지만 잠시 후 "전원구출"이라는 속보가 떴고 과실에 있던 동기들과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 저녁이 될때까지도 아이들과 희생자들은 구출되지 못했고 한동안 세월호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부터 쏟다냈습니다. 아직까지도 세월호 관련 이야기와 희생자 가족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슬퍼지고 눈물이 나옵니다. 이제는 밝혀져야 합니다. 7시간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왜 감춰야하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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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날이 흐렸다.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나는 친구들과 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며 의미 없는 손짓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기사를 발견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고, 그러나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날이 흐린데 어쩌냐, 그래도 모두 구조되어 다행이다." 그렇게 안심한 뒤 핸드폰을 다시 만졌다. 수업이 가까워졌다. 기사가 떴다. 전원 구조는 오보였다고. 그 차가운 바다에 몇백 명이 아직도 갇혀 있다고. 강의실은 어수선해졌고, 약속처럼 다음 수업은 시작됐다. 교수님이 빨갛고 부어 있는 눈을 하고 강단에 서셨다. 교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그 목소리가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혹시, 안산에서 온 학생 있니?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이 그 배에 탔으면, 혹시 그래서 가 봐야 하면 지금 나가도 괜찮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직감한 건 교수님의 그 말씀을 들은 순간부터였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뉴스를 확인했다.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나의 가족이었으며, 친구였으며, 동시에 나였다. 나와 똑같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심정이 참담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자꾸만 눈물이 배어나와 여러번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지옥 같은 4월을 보냈고, 그 이후로도 쭉 지옥 같았다. 지금도 나는, 지옥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옥을 초래한 사람들은 왜 기억할 수 없다고 하는가. 나는 그날의 공기, 온도마저 선명히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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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4.16,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세월호가 침몰했고 전원 구조 되었다는 뉴스의 문구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티비를 끈채 알바를 하러 갔다. 그리고 몇시간 지나지않아 그건 오보였고, 생존자의 숫자는 줄어들고 사망자의 숫자는 늘어갔으며 오열하며 울부 짖는 가족들의 모습이 어디를 틀어도, 어느곳을 들어가도 보였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여전히 4월 16일은 기억되고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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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소식을 접하고 당연히 아이들을 구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뉴스를 보다가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열심히 운동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구할 수 없으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에 울음을 터뜨리고 기구위에서 내려와야했죠. 그 후 얼마동안 밥을 잘 넘길 수가 없어서 체중이 많이 줄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단원고가 있던 안산시 와동쪽은 제가 과외를 가르치려 많이 다녔던 곳입니다. 운명을 달리한 아이들이 다 제 제자들인 것 같아 지금까지도 세월호 생각만 하면 가슴에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것 처럼 무겁고 힘이드네요. 우리 아이들,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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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포털사이트에 <전원구조>가 계속 올려져있길래, 당연한 걸! 왜 메인에 계속 띄워져있나 했었습니다. 이 상황도 아이들이 모두 보고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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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합니다 영어듣기시험을 보고있었고 선생님 한분이 들어와 배가 뒤집혔다고 하셨습니다 전원 구조가 됐다는 말에 급식을 먹을때까지 큰 걱정 하지 않았어요 핸드폰을 내지않고 가지고있던 친구 폰으로 네이버 1위에 단원고가 떴다면서 신기해했습니다 오보인것을 알고 난 이후에 핸드폰을 받고 친구들 폰으로 전화를 수없이 걸었습니다 신호음이 가서 친구들이 금방이라도 전화를 받을것만 같았는데 아무도 받지 않았어요 야자를 하면서 친구들과 계속 울었습니다 살아있을거라 믿었고 집에 와서도 뉴스를 보며 울면서 기도 하다 잠들었어요 친구들의 장례식에 가 펑펑 울던 그때가 너무도 선명합니다 아직도 등교길에서 보던, 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시시콜콜한 연락을 주고받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가자며 약속했던, 제주도에서 감귤초콜렛을 사온다던 친구들의 모습을 잊을수 없습니다 여전히 18살에 멈춰있는 나의 그립고 소중한 친구들과 추억을 나눌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친구들은 그 날에 멈춰있지만 멈춰있지않습니다 모두가 잊지않고 기억하기 때문에 멈춰있지않습니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평생 친구들을 기억하며 살아갈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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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날 학교가 일찍끝나서 집에 왔었습니다.전원구조라는 뉴스에아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독서실에 갔다왔습니다.하지만 저녁에 집에 와서 이것이 오보였다는 사실에 설마설마 하고 뉴스만 계속 밤새도록 보면서 울었습니다.저는 이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이 날을 기억 못하면 사람이 아니죠. 저는 정부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에 어이가 없고감추려고만 했던 이들에게 분노를 느낍니다.사람이 할 짓입니까?저는 절대 안 잊을겁니다.산소주입한다고 말하는 정부를 믿고 밤새서 생중계로 현장을 보며 기도했었는데....진짜 최악입니다.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있는 박근혜는 한번도 공식상에서 세월호 뱃지를 단 적이 없었고 당일날에도 7시간만에 나타나서 하는소리도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꼭 세월호의 진실을 밝힐겁니다.자꾸 안내려오는 이유중에 버티면 15년동안 문서를 공개안할수있다고해서 그러는거다라는 말도 있던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요구하는한 당신은 눈닫고 귀닫으며 진실을 묻을수없습니다.어둠을 빛을 이길수없고 진실은 침몰하지않거든요. 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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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마지막 중간고사 공부를 연구실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연구실을 쓰는 선배들이 뉴스 속보라며 배가 침몰 했다고 합니다.즐거운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을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배에 올랐을 사람들이 걱정이 됐습니다. 안타깝고 속이 답답했습니다. 각자 할일을 하다가도 속보가 떴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뉴스를 찾아봤습니다.가슴을 졸이다 "전원 구조" 됐다는 뉴스에 안심이 됐습니다. 그 시간동안 얼마나 무서웠을지...다행이라고 안도하며 귀가해 틀었던 티비 속에선 "전원 구조"가 오보라고 합니다.숨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또래의 동생이 있어 더더욱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지만 누군가의 부모, 자녀, 형제, 자매였음에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잔인하지 않습니까? 나는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있는데, 그들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에 탈출하지도 못하고 망망대해 위에서 상상도 못할 공포를 느끼고 있을 상황이?현실이 아프고 먹먹해 눈물이 났지만 바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뜻대로 무사히 그들이 돌아와 가족들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새벽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다다음날에도 뉴스를 보고 있었지만 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지금 이 시국에 세월호와 관련된 이들은 사라진 7시간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 합니다.기억나지 않는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닙니까? 죄없는 무고한 희생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생각합니다.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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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모두의.가슴에 고통으로 남아있는 그날의.기억..빠른시간내 세월호와 미수습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꺼내어 가족은 물론 국민가슴모두의.트라우마를 치유해야합니다..적어도 그때까진 지치지않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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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살배기 아들과 놀아주며 일상의 단조로움으오 지쳐하고 있었습니다.세월호를 뉴스로 지켜보며.. 사고가 났다 ,모두 구조되었다, 오보였다, 아이들이 갇혀있다, 가라 앉고 있다, 가라 앉았지만 공기가 남았으니 아이들이 살아있을거다, 아이들의 시신이 인양되는 과정까지...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습니다. 내 아이가 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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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일찍 끝나고 선생님께서 먼저 나가셨을때 몰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아이로부터의 외침 "야! 수학여행간 학생들이탄 배가 침몰했데" 다같이 뉴스기사를 읽기위해 머리를 들이밀었던기억, 그리고 누군가는 눈물을 훌쩍이며 나는 그런이들을 다독였던 기억 , 다행이 모두 구출되었단 소식에 반아이들이 함께 안도하며 웃었던 기억. 모두가 그렇게 다 구출되었단 오보에 모두 다시 책을 피고 다음시간을 위해 준비하고 수업을 듣던 그시간. 우리의 안도와는 다르게 희생자분들이 차가운 바다속에서 떨어야 했던 그시간. 그시간이 너무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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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가슴에 묻고 가족을 가슴에 묻은 아픔.그날이후 그 아픔은 고스란히 아직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현 정부의 오만한 태도와 아픈 국민의 마음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던 사람들.대신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그리고 그런 정부의 무능함으로 희생된 아이들과 가족들을 영원히 기억 할 것입니다.또다시 이렇듯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유가족 여러분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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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14년 4월 16일은 어김없이 학교를 갔다.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엔 연이어 속보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막 20살이었던 나는 해가 들어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불을 끄고 자라하는 상황에서 잠을 못이루고 네이버만 들락날락 거렸다. 비가 왔는데, 어두운 강의실에서 빗소리만 듣고 있었다. 먹먹했던 그날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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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초등학교를 마무리하는 경주 수학여행길에 오른 날이였다.. 직장맘인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이의 옷을 다림질해주고 도시락을 싸주었고.. 여늬 엄마들처럼 학교까지 배웅을 해주며 걱정반 설레임반으로 아이가 탄 버스를 보내고 부랴부랴 출근을 했었다. 회의하고 커피한잔하고 여행간 아들이 궁금할 즈음 인터넷 뉴스를 보는 순간...하.. 세월호 기사를 보았다... 놀랐을 아이들 생각에 순간 머리가 쭈뼛 섰지만 잠시후 전원구조란말에.. 안도의 한숨을.. 동료들과도 다행이다 라는 말을 연발...그런데.. 그런데.. 다시 아니란다... 나는 그때부터 안절부절 ... 벌벌 떨리는 손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운전을 하며 집으로 와버렸다..학교에선 안심 문자가 오고 아이도 전화를 걸었지만.. 경주로 가서 데리고 오고픈 맘이 앞서고..눈물만 나고.. 아직도 그날의 내감정이 뚜렷함에 지금도 다시 눈물이 난다..그때부터 희망과 신뢰는 이나라에 없었다..밥도 미안함에 편히 먹을수 없었고.. 잠도 편히 잘수 없었다.. 오직 내가 할수 있는건 가슴 아픈 기도와 밤잠 못자며 봤던 뉴스뿐...그 아픈 시간이 아직도 문신마냥 내가슴에 저며 있는데... 이나라의 원수라는 사람이 입을 쳐닿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줄이야..당신이 생각하는 국민을 위함이 과연 무엇일찌 나는 진정 그 머리통속 구경좀 하고 싶습니다!!